항복문서 주던 곳에서 뒤바뀐 운명, 항복문서 받아내다

 

 

 

1940년 5월, 프랑스가 기습적으로 독일군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벌어진 이해 못 할 실제 상황이다. 당시 프랑스군 전선 사령부 유선통신은 지역 우체국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전화교환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통적인 프랑스의 관습은 점심 후 항상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휴식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교환원들은 빗발치는 군부대의 전화 요청에 자신들의 오후 차 마시는 시간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었다. 이에 반발해 교환원 대표는 부대를 방문해 12시부터 14시까지의 점심시간을 지켜 줄 것을 부대장에게 강력히 요청했다. 결국, 그 시간에 프랑스군 사령부는 예하부대에 작전지시를 할 수 없었다. 교환원들은 전쟁보다 자신들의 차 마시는 시간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출처;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즈 지음).

 

 

 콩피에뉴 숲 속에 건립돼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영웅 포쉬 장군 동상.

 

 

 

 ◆ 전쟁보다 휴식이 우선인 전화교환원


 1940년 6월 4일 비극적인 당케르크 철수작전이 끝나면서 전선에서는 많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프랑스 수도 파리는 평화로웠다. 몇 차례 독일 공군기들이 파리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가했지만, 낙천적인 시민들은 전쟁을 그다지 현실적인 문제로 느끼지 않았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주요 시설에 피해가 발생해도 “이럴 리가 없을 텐데···”라는 일종의 비현실적인 생각에 젖어 있었다. 샹젤리제 호텔 로비에는 프랑스 위기를 화제로 우국충정을 늘어놓는 선남선녀들은 많아도 국가를 위해 실제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전쟁의 문제를 자기와는 상관 없는 먼 나라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프랑스는 파리를 ‘비무장 도시’로 선포한다. 무능한 프랑스 정치인들이 독일에 대항하는 아이디어라고 내놓은 것이라곤 바로 이 정책 하나뿐이었다.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를 총성 한 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당당하게 샹젤리제 개선문으로 행진하면서 점령했다. 거대한 만(卍) 형태의 독일 깃발이 개선문과 에펠탑 정상에 게양됐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1944년 8월 25일 연합군이 또다시 파리를 해방할 때까지 비참한 패전국 국민의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프랑스군 공식문서에는 120만 명이 독일군 포로가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확한 사망자의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략 40여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기간 중 독일 육군의 피해는 겨우 2만1000여 명에 불과했다.

 

 

 ◆ 콩피에뉴 침대 기차 칸 의도적으로 선정


 1940년 6월 22일, 프랑스 항복 대표단은 전날부터 독일군에 의해 약 30시간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녔다. 녹초가 된 그들을 히틀러가 데리고 간 곳은 프랑스 콩피에뉴 숲 속 빈 공터였다.

이 장소는 1918년 프랑스 포쉬 원수가 독일로부터 1차 대전의 항복문서를 받은 바로 그 현장이었다. 극적 효과를 즐기는 히틀러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독일이 22년 전 굴욕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바로 그 열차는 특별 박물관 안에 잘 보존돼 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으로 박물관 벽이 헐리고 그 침대차는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콩피에뉴 숲에 세워진 거대한 프랑스의 1차 대전 승전 기념탑은 독일 공병대에 의해 폭파되며 산산조각이 났다.

 히틀러가 프랑스 대표에게 요구한 항복조건은 가혹했다. 첫째, 프랑스 영토의 절반은 독일이 직접 통치하며 나머지는 비시 괴뢰정권이 관할한다. 둘째, 프랑스가 보호하는 반 나치 망명자들을 독일로 전원 강제송환토록 한다. 셋째, 프랑스 함대는 독일·이탈리아군 감시 아래 무장해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패전국 프랑스는 승전국 요구에 오로지 순응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항복조건 때문에 어제의 동맹국 영국과도 프랑스는 해군함정 처리문제로 갈등을 빚게 된다.

일부 프랑스 함정은 해외로 탈출하기도 했지만 대형함 4척은 정박지에서 영국 해군의 포격으로 격침당하며 1267명의 프랑스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비시 정권 수반 페텡은 영국과의 외교관계도 끊었다. 어제까지 피로 맺은 영·불 동맹이 이제는 원수지간으로 변한 것이다. 페텡 원수는 오래전 프랑스 육사에서 드골 생도를 교육했으나 바로 그 드골은 전쟁 중 영국에서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게 된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드골은 자신의 스승을 프랑스 법정에 세워 사형 선고를 받게 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두 차례 전쟁에서 교대로 항복 조인을 한 침대차 보관 기념관.

 

 

 

◆ 항복문서 쓴 침대차 창고 안에 숨겨져

 

 치욕의 항복문서를 주고받았던 침대차는 부끄러운 심경으로 창고 안에 숨어 있다.독일과 프랑스 간 역사적으로 얽히고설켜 복잡한 사연을 지닌 콩피에뉴 숲은 파리에서 1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도착역에서 콩피에뉴까지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택시뿐이다. 울창한 숲 속으로 한참 들어가면 넓은 공원형태의 광장이 나온다. 얼마나 택시기사를 기다리게 해야 할지 막연하다. 30분 정도의 대기시간을 약속하고 목표물을 찾아 뜀박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철로를 따라 숲 속에 들어가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차 대전의 프랑스 전쟁영웅 포쉬 원수의 동상이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던 포쉬 장군은 프랑스 국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분노의 눈빛으로 2차 대전 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던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광장 끄트머리의 침대차 보관 기념관은 굳게 문이 잠겨 있었다. 겨울철 여행 비수기로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관리하는 직원조차 보이지 않았다. 흡사 프랑스의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가 서린 그 자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은 듯 항복 조인 열차는 깊숙한 창고 속에 숨어 있었다. 까치발로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기념 표지석의 설명문만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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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니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