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문서 주던 곳에서 뒤바뀐 운명, 항복문서 받아내다

 

 

 

1940년 5월, 프랑스가 기습적으로 독일군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벌어진 이해 못 할 실제 상황이다. 당시 프랑스군 전선 사령부 유선통신은 지역 우체국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전화교환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통적인 프랑스의 관습은 점심 후 항상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휴식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교환원들은 빗발치는 군부대의 전화 요청에 자신들의 오후 차 마시는 시간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었다. 이에 반발해 교환원 대표는 부대를 방문해 12시부터 14시까지의 점심시간을 지켜 줄 것을 부대장에게 강력히 요청했다. 결국, 그 시간에 프랑스군 사령부는 예하부대에 작전지시를 할 수 없었다. 교환원들은 전쟁보다 자신들의 차 마시는 시간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출처;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즈 지음).

 

 

 콩피에뉴 숲 속에 건립돼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영웅 포쉬 장군 동상.

 

 

 

 ◆ 전쟁보다 휴식이 우선인 전화교환원


 1940년 6월 4일 비극적인 당케르크 철수작전이 끝나면서 전선에서는 많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프랑스 수도 파리는 평화로웠다. 몇 차례 독일 공군기들이 파리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가했지만, 낙천적인 시민들은 전쟁을 그다지 현실적인 문제로 느끼지 않았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주요 시설에 피해가 발생해도 “이럴 리가 없을 텐데···”라는 일종의 비현실적인 생각에 젖어 있었다. 샹젤리제 호텔 로비에는 프랑스 위기를 화제로 우국충정을 늘어놓는 선남선녀들은 많아도 국가를 위해 실제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전쟁의 문제를 자기와는 상관 없는 먼 나라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프랑스는 파리를 ‘비무장 도시’로 선포한다. 무능한 프랑스 정치인들이 독일에 대항하는 아이디어라고 내놓은 것이라곤 바로 이 정책 하나뿐이었다.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를 총성 한 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당당하게 샹젤리제 개선문으로 행진하면서 점령했다. 거대한 만(卍) 형태의 독일 깃발이 개선문과 에펠탑 정상에 게양됐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1944년 8월 25일 연합군이 또다시 파리를 해방할 때까지 비참한 패전국 국민의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프랑스군 공식문서에는 120만 명이 독일군 포로가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확한 사망자의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략 40여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기간 중 독일 육군의 피해는 겨우 2만1000여 명에 불과했다.

 

 

 ◆ 콩피에뉴 침대 기차 칸 의도적으로 선정


 1940년 6월 22일, 프랑스 항복 대표단은 전날부터 독일군에 의해 약 30시간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녔다. 녹초가 된 그들을 히틀러가 데리고 간 곳은 프랑스 콩피에뉴 숲 속 빈 공터였다.

이 장소는 1918년 프랑스 포쉬 원수가 독일로부터 1차 대전의 항복문서를 받은 바로 그 현장이었다. 극적 효과를 즐기는 히틀러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독일이 22년 전 굴욕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바로 그 열차는 특별 박물관 안에 잘 보존돼 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으로 박물관 벽이 헐리고 그 침대차는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콩피에뉴 숲에 세워진 거대한 프랑스의 1차 대전 승전 기념탑은 독일 공병대에 의해 폭파되며 산산조각이 났다.

 히틀러가 프랑스 대표에게 요구한 항복조건은 가혹했다. 첫째, 프랑스 영토의 절반은 독일이 직접 통치하며 나머지는 비시 괴뢰정권이 관할한다. 둘째, 프랑스가 보호하는 반 나치 망명자들을 독일로 전원 강제송환토록 한다. 셋째, 프랑스 함대는 독일·이탈리아군 감시 아래 무장해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패전국 프랑스는 승전국 요구에 오로지 순응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항복조건 때문에 어제의 동맹국 영국과도 프랑스는 해군함정 처리문제로 갈등을 빚게 된다.

일부 프랑스 함정은 해외로 탈출하기도 했지만 대형함 4척은 정박지에서 영국 해군의 포격으로 격침당하며 1267명의 프랑스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비시 정권 수반 페텡은 영국과의 외교관계도 끊었다. 어제까지 피로 맺은 영·불 동맹이 이제는 원수지간으로 변한 것이다. 페텡 원수는 오래전 프랑스 육사에서 드골 생도를 교육했으나 바로 그 드골은 전쟁 중 영국에서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게 된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드골은 자신의 스승을 프랑스 법정에 세워 사형 선고를 받게 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두 차례 전쟁에서 교대로 항복 조인을 한 침대차 보관 기념관.

 

 

 

◆ 항복문서 쓴 침대차 창고 안에 숨겨져

 

 치욕의 항복문서를 주고받았던 침대차는 부끄러운 심경으로 창고 안에 숨어 있다.독일과 프랑스 간 역사적으로 얽히고설켜 복잡한 사연을 지닌 콩피에뉴 숲은 파리에서 1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도착역에서 콩피에뉴까지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택시뿐이다. 울창한 숲 속으로 한참 들어가면 넓은 공원형태의 광장이 나온다. 얼마나 택시기사를 기다리게 해야 할지 막연하다. 30분 정도의 대기시간을 약속하고 목표물을 찾아 뜀박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철로를 따라 숲 속에 들어가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차 대전의 프랑스 전쟁영웅 포쉬 원수의 동상이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던 포쉬 장군은 프랑스 국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분노의 눈빛으로 2차 대전 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던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광장 끄트머리의 침대차 보관 기념관은 굳게 문이 잠겨 있었다. 겨울철 여행 비수기로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관리하는 직원조차 보이지 않았다. 흡사 프랑스의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가 서린 그 자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은 듯 항복 조인 열차는 깊숙한 창고 속에 숨어 있었다. 까치발로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기념 표지석의 설명문만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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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저 차 심하고, 지면 거친 아프간 지형에 딱’

 

 

고저 차가 심하고 지면이 거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형.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투가 계속되면서 미군은 산악용 전투화 선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어느 나라의 군용 장비나 다 그렇지만, 미국 역시 군용 장비, 특히 개인장비의 경우 현재 가장 격전이 치러지는 곳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된다.

베트남 전쟁 중 정글 장비가 크게 늘어난 것도 그렇지만 최근에도 2003년부터 약 6년간 미군 보병 장비는 중동 사막지역에서의 사용을 중심으로 개발과 배치가 이뤄졌으며, 그 뒤로 최근 약 3~4년간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산악 전투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2년 사이에는 아프가니스탄 참전 경험 부대가 늘어나면서 미군 내에서 표준 제식인 ACU가 아닌 멀티캠 위장복을 입은 병사들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전투화에서도 이런 ‘아프가니스탄 특수’가 나타나고 있다. 기존에는 사막이나 열대, 온대/한대 등 해당 지역의 기후에 따라 전투화 종류가 나뉘었으나 아프가니스탄 전선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기존 전투화로는 무리라는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됐기 때문이다.

고저 차가 심하고 지면이 거친 산악지대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일반 전투화는 내구성이 떨어지고 착용자의 발에 적잖은 부담이 가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미 육군의 아프가니스탄용 산악전투화 MCB. 장시간의 등산활동에 적합하고 밑창 바닥 부분은 바위나 경사지 등에서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게 특수 디자인된 것이 특징이다. 필자 제공

 



이 때문에 미군은 2011년 초까지 약 2년간 산악용 전투화 선정 작업을 거쳤고, 그 결과 2011년 2월에는 벨빌(Belleville) 사의 모델 950 산악용 전술화가 미군의 산악 전투화(Mountain Combat Boots: MCB)로 선정돼 2만5000족이 현지에 파견된 육군 여단 전투단들에 지급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산악 전투화는 문자 그대로 등산화의 패턴을 상당부분 답습하고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등산화를 기초로 만든 전투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 부분이 일반 전투화보다 2~3㎝ 정도 짧고, 전체적인 디자인도 기존의 전술화보다 등산화로서의 형태를 더 따랐다. 발목이나 기타 발 안쪽의 보강 부위나 완충 부위 등도 장시간의 등산활동에 적합하게 돼 있으며, 특히 밑창의 바닥 부분은 바위나 경사지 등에서 쉽게 미끄러지지 않게 특수 디자인된 것이다.

 MCB의 기본 모델인 950형은 내부에 고어텍스 내장재가 들어 있어 방수-투습은 물론 어느 정도 보온성까지 갖추고 있다.

이는 동계, 혹은 야간에 매우 요긴하지만 상당한 고온이 되는 아프가니스탄의 하계 상황에서는 병사들에게 피로감을 더하는 것은 물론 물집 등의 부상 원인이 되곤 한다.

이로 인해 2011년 중에 미 육군은 하계 작전을 위한 신모델, 990형을 채택했다.

 990형은 방수성을 희생해서라도 통기성을 높이기 위해 고어텍스 내장재를 제거하고 환기공을 설치했다. 또 가죽의 양을 줄이고 고강도 나일론인 코듀라 소재 사용량을 늘렸다.

이로 인해 덜 딱딱해 착용감이 편해졌고, 또 무게도 800g 정도 감소되면서 장시간 착용 시 따르던 피로감과 체력 소모가 크게 줄었다.

특히 착용감 부분에서는 기존의 950 모델이 내구성을 의식, 지나치게 단단해 일부 병사들이 전투화를 다시 착용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개량이 중요했다고 한다.

 990 모델에서는 방수능력이 실질적으로 없지만, 대신 내부에 축적된 습기가 빨리 마르게 돼 있다.

또한 통기성도 기존 950 모델보다 약 2.5배 높아졌으며, 소재의 항균처리가 돼 있어 곰팡이 및 세균의 번식을 최대한 억제한다.

이는 감염의 위험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악취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홍희범 월간 ‘플래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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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 안의 아군 구조’ 영국 배 총출동

가슴 한편엔 ‘비참한 패주’로 남아 …  전몰장병 묘역은 쓸쓸한 적막감만

 

 

 철수작전 중 독일군 공격을 받는 영국 함정. (출처:덩케르크 해양박물관)

 

 

 ▶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결정적인 실수 독일 기갑군단의 쾌속 진격 중지 지시.

 

 1940년 5월 25일 아침, 숨 가쁘게 영·불 연합군을 추격해 온 구데리안의 독일군 전차부대는 덩케르크를 불과 20㎞ 앞두고 있었다. 이제 연합군은 흡사 목에 밧줄이 감기어 누군가가 잡아당기기만 하면 숨이 끊어질 수 있는 위기에 놓인 사형수의 입장이 됐다. 바로 이 순간 “귀관의 부대는 일단 현 위치에 정지하고 추후 명령을 기다릴 것!”이라는 믿기 어려운 히틀러의 지시문이 독일군 기갑군단에 떨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전 기간을 통해 독일군이 저지른 가장 큰 작전상의 실패 중 하나이며 이 뜻밖의 행운 덕분에 수십만 명의 연합군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전쟁 후 수많은 역사학자는 히틀러의 이런 지시 배경에 대해 연구했으며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째, 전쟁 발발 후 보름간 너무나도 수월하게 얻어 온 손쉬운 승리가 히틀러로 하여금 새삼스러운 조심성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이 공군력만으로도 덩케르크 해변의 연합군을 쓸어 버릴 수 있다는 허풍이 히틀러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히틀러는 영국군의 명예로운 철수를 허용함으로 앞으로 영국과의 강화조약을 염두에 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영국군 섬멸을 위한 히틀러의 내부적인 각종 지시를 분석해 볼 때 설득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시행된 덩케르크 철수(일명 Dynamo 작전)를 통해 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 장병 33만8682명이 목숨을 구했다. 그럼에도 5월 20일 이후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에서 독일군에 포위된 연합군 100만 명 중 얼마나 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었는지 아직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다.

 

일반 공동묘지와 함께 조성된 영·불 연합군 전몰장병 묘역.

 

 

 ▲템즈 강의 거룻배로부터 민간 여객선까지 끝없는 선단이 도버해협을 건너 덩케르크로 향했다.

 13세의 영국 소년 윌리엄은 해양소년단 연습용 돛단배를 갖고 친구들과 함께 덩케르크로 가는 군함을 따라나섰다. 군함의 뒷갑판에서 수병이 마이크로 위험하니 되돌아가라는 권고 방송을 아무리 내보내도 요지부동이었다. “괜찮아요. 우리는 해양소년단원입니다. 우리 돛단배에 군인 아저씨 5명쯤은 태울 수 있다고요!” 군함이 뿜어내는 거친 파도 속에서 위험스러운 항해 끝에 윌리엄과 그 친구들은 그 작은 돛단배에 결국 30여 명의 영국군을 태우고 성공적으로 도버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시작되면서 영국 해군성은 전국 모든 배에 징발명령을 내렸다. 템즈 강의 유람선으로부터 구시대의 유물인 증기선, 개인 소유의 호화 요트에 이르기까지 온갖 배가 프랑스와 마주 보는 도버 해안으로 몰려들었다. 배 소유주인 민간인들의 불평 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징발대상에서 제외된 침몰 직전의 낡은 어선과 소형 모터보트의 주인들까지 달려와 자기들이 직접 조종해 덩케르크로 가겠다고 해 해군 당국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형형색색의 배들로 구성된 선단이 영국군 구조를 위해 출항하자 해군에 의해 참가를 거절당한 온갖 배들이 애국심에 불타는 시민들에 의해 선단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윌리엄과 그 친구들도 그 일행 중의 한 무리였다.

 아비규환의 덩케르크 해변! 바늘 꽂을 틈도 없이 부두를 빼곡히 메운 병사들은 독일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퍼부으며 달려들어도 그저 자리에 납작 엎드려 총탄이 자신을 피해 가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초췌하고 피로에 지친 수많은 영국군이 긴 줄을 이뤄 철수순서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대부분의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질서정연했고 패주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명의 병사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대형선박의 구명보트를 모두 바다에 내려놓았다. 보트에 탄 병사들은 철모로 물을 퍼내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노를 저었다. 놀랍게도 이런 방법으로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돌아온 군인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작전 기간 중 동원된 총 861척의 선박 중 13척의 구축함을 포함해 272척이 침몰했고 영국 공군은 177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군과 민간의 혼연일체로 진행된 이와 같은 철수작전으로 유럽파견 영국군의 대부분은 고스란히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날 ‘덩케르크 철수’라는 말은 혼란 속의 비참한 패주를 뜻함과 동시에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빠져 나온 행운을 상징하는 말로 기억되게 된다.

 1940년 6월 4일 오전 2시, 드디어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일부가 덩케르크 시내로 밀고 들어간다. 미처 철수선박을 타지 못한 8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우왕좌왕하며 해변에 남아 있었다. 해안 모래사장에는 연합군이 남기고 간 6만3000여 대의 차량, 2만 대의 오토바이, 475대의 전차와 장갑차량, 2400문의 야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독일군 1개 야전군이 활용 가능한 물량이었다.

 

 ▲덩케르크 해변의 전쟁 기념비는 찾기 어렵고 전몰장병 묘역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오늘날 덩케르크 해안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손꼽힌다. 백사장 주변 해안도로에는 음식점들과 대형극장이 늘어 서 있다. 1940년 5월의 비극을 상상할 수 있는 전쟁기념탑이나 추모비는 찾아보기 어렵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아일랜드인 브랜단 씨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프랑스의 무관심을 성토하고 있는데 옆자리의 어떤 사람이 불쑥 끼어들며 반박한다. 그는 덩케르크 시 공무원이었다. 흥분한 그 사람이 전쟁기념 현충석벽과 연합군 묘지가 있다며 안내를 자청한다. 그와 함께 간 영·불군 묘역은 일반 공동묘지와 같이 조성돼 있었다. 프랑스 국기가 없다면 전몰장병 현충시설로 구분되기도 어려웠다. 또한 전쟁기념 석벽은 해변에서 자동차로 한참 걸렸다. 더구나 어둠까지 찾아와 자세히 식별하기도 곤란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영국군 위주의 작전이었고 상당수의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포로로 남겨졌다. 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서운한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시내의 해양박물관 일부 전시관에서는 비교적 소상하게 제2차 세계대전 시 덩케르크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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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스 상태서 낙하산보다 활공시간 현저히 감소…

 

휴대용 고공 낙하 스텔스 비행 슈트.  출처:www.spelco.eu

 

 

윙 슈트만 입고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을까? 2011년 12월 사람이 착용하면 하늘을 날 수 있는 윙 슈트(Wing Suite)가 등장해 눈길을 모았다. 트랜스 포머(Ⅲ) 영화에서는 로봇만 나는 게 아니라 사람도 하늘을 날았다. 이 영화에서 사람이 윙 슈트를 입고 시속 240㎞의 속도로 공군의 F-22전투기와 나란히 비행하는 장면은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낙하 지점에 순식간에 고공 낙하한 후 적에게 들키지 않고 장거리를 활공해 적지에 침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머지 않아 하늘에서 기습 공격을 가하는 특수부대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장비는 은밀한 침투가 생명과도 같은 특수부대의 비밀작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장비다.

 독일의 벤처회사인 SPELOC(Special Parachute and Logistics Consortium) 사는 다양한 낙하산 시스템과 헬멧·산소공급장치 등의 기기와 훈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다. 이들은 기존의 낙하산이 갖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체 이탈과 동시에 낙하산을 펴 이동하는 고고도 강하작전(HAHO : High Altitude High Opening)용 낙하시스템인 그리핀을(Gryphon) 제시했다. 그리핀은 원래 독수리의 머리·날개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그리핀은 헬멧에 디스플레이가 내장돼 있어 조종이 가능하며 독수리 날개와 같은 1.8m의 윙은 약 5대 1의 글라이드 비율로 활공할 수 있다. 만약 10㎞ 상공에서 강하하면 40㎞ 이상 활공해 순식간에 위험지역을 통과, 원하는 곳에 낙하할 수 있는 스텔스 외형의 탄소섬유 재질 프레임을 가진 최신 낙하 시스템인 것이다.

 그리핀을 사용하면 적의 레이더 탐지 및 공격을 받지 않고, 원거리에서 강하작전이 가능하며, 활공 중에는 모든 장비를 본체 안에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스텔스 상태에서 기존 낙하산보다 활공시간을 현저히 감소시킬 수 있어 신속·은밀한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시스템에는 목적지의 좌표와 위치 파악이 가능토록 자동 비행장치와 항법시스템이 장착돼 있어 목적지에 보다 정확하게 안착할 수 있다. 또 야간 혹은 악천후 조건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므로 기존 낙하시스템보다 낙하임무의 작전 폭을 훨씬 넓힐 수 있다.

 현재는 낙하산을 낙하자가 직접 조종하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지만, 향후에는 전자동 조작 방식을 이용해 자동으로 목적지 이동이 가능하고, 소형 터보제트 엔진을 추가해 이동 속도를 더 증가시키는 것까지 계획하고 있다. 계획이 성공 한다면 작전에 필요한 많은 장비를 갖고 순식간에 80㎞ 이상까지 이동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시스템의 가장 큰 난제는 낙하산 없이 비행 슈트만으로 착지가 가능한가 하는 점이지만, 이 문제 또한 연구자들이 착지 시 윙 슈트 착용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기술이나 또 다른 장치를 개발하는 것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미래의 낙하산 병사는 박쥐인간처럼 정확한 목표지점에 은밀하게 침투해 적의 핵심시설을 기습공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김용수 국방기술품질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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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지역 걸프전 계기
‘데저트 부츠<사막용 전투화>’ 개발



미 육군의 신형 전투화 ACB(온대기후용).

ACB의 열대기후용 전투화.



미군이 진한 갈색과 검은색 가죽 전투화를 오랫동안 사용해 왔지만 색은 달라도 가죽에 광을 내 써야 한다는 공통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이 중동지역을 주 작전구역 중 하나로 상정하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사막의 모래먼지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광을 낸 가죽 전투화 유지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또 습기는 없지만 더위로 인해 흘린 땀이 문제가 되면서 습기 해결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국은 데저트 부츠, 즉 사막용 전투화를 걸프전을 계기로 개발했다. 이것은 정글 부츠를 사막용으로 개량한 것으로, 가죽은 황토색의 거친 표면을 가진 스웨이드 가죽으로 바뀌어 광을 낼 수 없게 됐다.

기본 구조는 정글 부츠와 같지만 배수구 부분이 모래는 막으면서 습기는 배출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어 사막 환경에서의 적응을 쉽게 했다. 하지만 데저트 부츠 개발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까지 미군의 전투화는 고전적인 가죽 전투화였다. 이것이 변화를 맞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 미 육군과 해병대가 새로운 위장 전투복을 개발하면서부터다.

여기에 맞추면서 표준 전투화 자체를 광택을 낼 수 없는 스웨이드 가죽 제품으로 바꾸게 됐다. 거의 동일한 전투화를 육군은 ACB(육군 전투화), 해병대는 MCCB(해병대 전투화)라는 이름으로 채택했으며, 둘 사이의 차이는 각인 정도다.

 ACB/MCCB는 기존의 전투화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이 전투화는 처음부터 일반용(온대지방용)과 열대용의 두 종류로 나뉜다. 일반용도 하부는 가죽, 상부는 나일론으로 만들어져 기존의 정글 부츠와 구조가 유사하다. 게다가 황토색의 스웨이드 가죽으로 만들어져 광택을 낼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술의 발달 때문으로, 광택을 내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구두약을 이용해 가죽에 지속적으로 광을 내는 것으로 가죽에 방수 피막을 유지했으나 이제는 가죽 자체의 약품처리를 통해 방수·투습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온대지방용 전투화의 경우 가죽 안쪽에는 방수·투습 능력을 갖춘 고어텍스 내장재가 들어있기 때문에 가죽 자체가 설령 방수성을 잃어도 신발의 방수성은 충분히 유지된다.

 또 다른 장점은 착용 편의성과 내화 성능이다. 나일론 부분도 발목이 조여지는 부분은 가죽을 덧대고 충격흡수 안창을 채택함으로써 착용자의 부담과 불편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고무 밑창은 석유화학 제품에 닿아도 녹지 않도록 제조됐으며, 일정 수준의 내화 성능도 갖고 있다. 전체적인 전투화 자체의 내화 성능도 상당한 수준으로, 미군에서는 이것이 화재 위험성이 있는 전투차량 및 항공기 승무원의 착용이 가능하다고 인정되고 있다.

 기본형은 온대지방용 전투화지만 ACB/MCCB에는 앞서 언급했듯 열대용 전투화도 있다. 이것은 사막·정글 등에서의 사용을 전제로 한 것이다. 기본 디자인은 과거의 정글 부츠와 비슷하며 땀에 의해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해 정글 부츠나 기존의 데저트 부츠처럼 모래는 막아도 습기 배출은 가능한 배수구가 설치돼 있으며, 배수구로 인해 의미가 없는 고어텍스 방수층은 제거됐다. 미군은 현재 온대용과 열대용 두가지를 필요에 맞게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홍희범 월간 ‘플래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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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문장서 유래한 ‘최고·으뜸’ 의미


계급은 지위나 관직 등의 등급을 말하며 계급장은 군인의 군복에 부착하거나 차량 등에 달아 계급을 나타낸다. 문헌을 통해 로마시대의 부사관 계급을 보면 로마병 10명을 지휘한 프린키팔리스(principalis)는 하사, 테세라리우스(Tesserarius)는 선임부사관으로 중사 또는 상사, 오피오(Opio)는 주임상사로 오늘날의 계급으로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계급장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직책에 따라 복장 또는 복색으로 구분했던 것 같다. 중세의 ‘Sergeant’는 오늘날 ‘병장’, ‘Corporal’은 ‘상병’으로 오늘날 미군에서는 상병부터 부사관으로 대우하고 있다. 부사관 계급장인 ‘∧’ 또는 ‘∨’ 표시를 불어로 쉐브런(Chevron)이라 하는데 ‘지붕 꼭대기, 용마루’를 의미하며 최고 또는 으뜸을 뜻한다.

이는 중세 봉건시대의 기사나 남작의 의복이나 방패·창 등에 신분 표시 수단으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됐으며, 영국에서 1803년 처음으로 오늘날과 같은 갈매기(∧) 두 개를 겹쳐서 ‘Corporal’ 계급장으로 사용한 것이 여러 나라로 전파됐다. 




 ◆ 우리나라 부사관 계급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대한제국 이전의 우리 군의 계급체계에서는 장교와 부사관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사관의 계급구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시대 무관계급 중 종9품(전력부위)은 현재의 하사, 정9품(효력부위)은 중사, 종8품(신승부위)은 상사, 정8품(승의부위)은 원사 계급에 해당되지 않을까 추정할 수 있다.

현대적 개념의 계급체계는 1894년(고종 31년) 칙령 제10호가 공포되면서 비롯됐다. 당시 계급체계는 영관은 정령(현재 대령), 부령(중령), 참령(소령)으로, 위관은 정위(대위), 부위(중위), 참위(소위)로 구성했다. 부사관은 정교(상사), 부교(중사), 참교(하사)로, 병은 상등병(상병), 일등병(일병), 이등병(이병) 등 3등급으로 나눴으며 장관급 장교는 두지 않았다. 이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해산되면서 광복군(1907~1945)에서는 참사(하사), 부사(중사), 정사(상사), 특무정사(원사) 등 4등급의 부사관 계급을 사용했다.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 창설 시 장교 계급과 함께 부사관 계급도 제정됐다. 당시 부사관 계급을 참교·부교·특무부교·정교·특무정교·대특무정교 6등급으로 구분했으나 계급구조만 있었지 실제 계급장은 제정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46년 4월 5일 미군 비이숍 대령에 의해 미군 부사관 계급장(∧형, chevron)을 뒤집어 ‘∨’자 형태로 고안한 계급장을 국방색 모직 포제(布製)에 적색으로 표시해 사용했다. 그 후 1946년 12월 1일 계급구조를 변경하지 않고 호칭만 변경해 하사(현재 상등병), 이등중사(병장), 일등중사(하사), 이등상사(중사), 일등상사(상사), 특무상사(원사)로 개칭했다.

한편 6ㆍ25전쟁 중에는 계급장을 전투복에 부착할 수 있도록 녹색바탕의 황동재질에 황금색으로 계급을 표시했는데 그 재질이 얇아 속칭 ‘깡통계급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1962년 부사관 계급은 하사·중사·상사 3등급으로 개정됐고 1967년에는 부사관 및 병 정복이 제정됨에 따라 병과 구별이 쉽도록 계급장 색상을 흰색 바탕에 검정색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직업군인으로서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 계급장에 별을 추가했다. 그러나 개정된 계급장은 색상 면에서 복장과 상이하고 쉽게 더러워지는 등 미관상 좋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어 같은 해 바탕색을 국방색으로 변경했다.

1971년에는 부사관과 병 계급 식별이 용이하도록 병은 한 일(一)자 형으로, 부사관은 병장 계급장 위에 ‘∨’자형으로 다시 개정하고 주임상사만이 별을 부착하도록 했다.

1989년 군인사법 개정으로 부사관 계급구조가 하사·중사·이등상사·일등상사 4등급으로 변경됨에 따라 상사 계급장은 이등상사 계급장을 그대로 사용하고 추가된 일등상사 계급장은 이등상사 계급장 위에 초생달 모양의 관을 올린 형태로 정했다.

 1994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부사관 계급구조인 하사·중사·상사·원사로 변경됐으며, 1996년에는 부사관의 사기진작과 자긍심 제고를 위해 장교와 유사한 형태의 무궁화 표지를 부착하는 계급장 모양으로 변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적으로 각 신분별 계급장의 의미를 살펴보면 병의 계급장은 지상(지표)을 의미하며 부사관의 계급장은 지표 위의 식물을 뜻한다.

장교의 계급장 중 위관장교의 계급장은 초급간부의 굳건한 국가수호 의지를 단단하면서 깨지지 않는 특성을 지닌 금강석으로 형상화했고, 영관 계급장은 소위 계급장에 9개의 대나무 잎을 둘러쌓아 4계절 푸른 기상과 굳건한 절개를 표현한 것이다.

장관급 장교는 하늘의 별을 상징한다. 이렇듯 계급장은 땅속의 금속, 지상의 식물, 우주의 별로 승화돼 우주의 삼라만상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육군부사관학교 행정부장 장현민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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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자부심이 佛 상무정신 순식간에 자괴심으로


프랑스 칼레 해변 휴양지의 독일군 해안포 진지를 도색한 모습.


프랑스의 칼레 해변에서 바다 건너편 영국을 보면 도버 항구의 하얀 절벽(white cliff)이 어렴풋이 보인다.이곳 칼레는 영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역사적으로 전쟁이 빈번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운명을 가진 듯하다.부산항이 일본과 근접함에 따라 수백 년 전부터 빈번한 왜구 침범이 있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아시아 대륙 진출 발판이 된 것과 흡사하다.


 ▶사회 지도층은 국민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1337~1453) 중 ‘칼레’는 영국군에 포위된다. 칼레 시민들은 거센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는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항복하게 된다. 칼레 시민군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항복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영국 왕은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며 도시 대표 6명에 대해 교수형을 요구했다. 이 상황에서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처형을 자처한다. 이어서 시장·상인·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교수형을 동참한다.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여섯 명의 귀족이 교수대에 모였을 때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동한 영국 왕은 결국 사면하게 된다. 이와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은 이곳 프랑스 칼레에서 약 600여 년 전에 처음 생겨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1940년 5월 훌륭한 상무정신을 자랑했던 프랑스 선조의 전통이 못난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서 독일군에 또다시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아직도 1600년대에 축성한 견고한 칼레성이 해안에 버티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1940년께 독일군이 건설한 거대한 해안 포 진지들이 또한 산재해 있다. 수많은 휴양객이 찾는 시내 주변 해안의 독일군 해안포대는 시멘트로 봉합한 후 페인트로 깨끗하게 정겨운 그림을 그려 놓았다. 관심 깊게 보지 않으면 오가는 여행객들을 위한 화장실로 착각하기도 한다.



독일군 통신벙커를 활용한 프랑스 칼레 전쟁기념관.


 ▶패전의 역사도 전시하는 칼레 전쟁기념관

 칼레 전쟁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이 통신벙커로 사용했던 시설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기다란 콘크리트 벙커의 내부를 고쳐 제1·2차 세계대전 당시의 각종 무기·장비와 유대인·프랑스군 포로에 대한 독일군들의 잔학행위에 대한 기록과 사진들이 주로 전시돼 있다.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돼 있으나 이곳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념관 내부의 전시물과 각종 사진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필자 혼자뿐. 전시 벙커인지라 두꺼운 콘크리트 격실은 극히 협소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불과 6주 만에 프랑스는 제대로 된 결정적인 전투도 없이 항복했다. 그것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시 과거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았다며 승전국으로서 당당하게 독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던 ‘꽁삐에뉴’ 숲 속 바로 그 기차 안에서 이제는 거꾸로 독일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레지스탕스의 저항 외에는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프랑스는 이 기념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군복과 무기류를 많이 전시했다. 또한 독일군에 대거 포로로 잡힌 프랑스 군인들이 명예로운 자신들의 군복을 벗고 죄수복으로 갈아입는 사진도 수치스럽지만 걸어 두고 있다. 프랑스 포로들이 구걸하는 듯한 모습으로 독일 경비병들에게 반합을 내밀고 있는 그림까지 있었다. 당장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군인의 자존심도 내팽개친 듯하다. 아울러 무게 56톤, 구경 406㎜의 거대한 독일군 해안포 진지건설과 포탑 운반과정을 여러 사진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기중기를 부분적으로 활용하지만 대부분은 개미떼처럼 달라붙은 수많은 전쟁 포로와 점령지 주민에 의해 이뤄졌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진들은 어깨에 프랑스 국기를 단 여성들이 군수공장에서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많은 전쟁 포스터와 함께 제시된 이 사진들은 추정컨대 영국 내의 무기 공장인 듯했다. 특히 각종 그림은 영국·미국 여성들에게 전시 조국을 위한 각종 노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홍보하고 있다. 옷소매를 높이 걷어붙이고 알통을 자랑하면서 “We can do it!(우리는 할 수 있다)”이라고 외치는 영국 여성의 당찬 모습이 눈길을 끈다. 미리 전쟁에 대비해 프랑스인들이 평시에 저런 노력의 10분의 1이라도 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록 자랑할만한 전쟁승리에 관한 영광의 전시물은 별로 없었지만, 과거 패배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정확하게 알리고자 하는 정직한 프랑스인들의 역사의식은 본받을 만했다.


 ▶아일랜드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하는 어느 아이리시(Irish) 여행객

 기념관 관람을 거의 끝낼 즈음 프랑스군 포로와 유대인들의 처참한 삶에 대해 꼼꼼히 살피고 있는 한 중년 신사를 만났다. 텅 빈 전시관에서 두 사람만 있으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관심을 표시한다. 그는 아일랜드인으로 특히 세계 전쟁사에 관심이 많다며 자기 나라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700여 년 지배를 받는 동안 가난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아이리시(Irish)들이 해외 이민을 떠났다.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전사자의 40%가 아이리시였다. 고달픈 이민자들은 단지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군에 지원했고 동족끼리 총칼을 겨눠야만 했다. 1921년 가까스로 독립하면서 아일랜드는 또다시 1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는다.

 이런 처참한 과거를 가진 자기의 조국을 늘 가슴 아파했던 브랜단(Brandan·55) 씨는 자연스럽게 세계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거주하며 현재 목수 일을 하고 있다. 12세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화학공장에서 일하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독한 화학물질의 후유증으로 현재 시력장애가 있으며 의사는 그에게 컴퓨터 사용을 금지시켰다. 개인의 역사인식은 명문대학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 하는 학력의 문제가 아니고 브랜단 씨처럼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기 민족의 문제를 얼마나 고민하느냐에 따라 결국 결정된다는 것을 느꼈다. 의기가 투합된 두 사람은 칼레 가까이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시 비극의 현장 덩케르크에 같이 가기로 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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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OS<데이터전송률:최고 384 kbps> 경우
전장 최하위 제대까지 통신능력 제공



MUOS 위성 네트워크. 출처:Australian Defense



지난해 5월, 9·11 테러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 요원들에 의해 사살됐다는 소식에 전 세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빈 라덴 공격작전이 진행되는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구 건너편 백악관 상황실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참모진들이 지켜봤다는 사실이다.

 실시간 작전 상황은 전투요원들의 헬멧에 장착된 카메라 영상을 암호화해 통신위성을 통해 전송됐는데 이에 활용된 것이 바로 미국이 운용하고 있는 광대역(대용량) 위성인 DSCS(Defense Satellite Communication System)-III 위성과 MILSTAR 위성이었다.

 미국의 위성통신체계는 일반적으로 운용 형태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생존성과 항재밍성을 강화한 보안(Protected)형, 대용량의 동영상 전송이 가능한 광대역(Wideband)형, 그리고 이동성을 강화시키도록 휴대용 단말기와 상호 연동할 수 있는 협대역(Narrowband)형이 있다. 위성들은 지휘통제, 상황인식과 정보의 분배를 위한 음성·데이터·영상·방송서비스 제공의 임무를 수행해 미국 본토와 해외 파병지역 간의 실시간 정보공유를 지원한다.

 위성별 데이터 처리 용량의 경우 보안형은 MILSTAR(총용량:~40Mbps), 광대역형은 DSCS(총용량:~100Mbps), 그리고 협대역형은 UFO(UHF Follow-On Satellite 총 8개의 위성체, 총단말 7500여 대 운용, 수십 대 단말 동시접속)가 운용 중이다. 현재 운용하고 있는 UHF대역(200~400MHz)에서의 소용량 위성인 UFO시스템은 차기 위성인 MUOS(데이터전송률: 최고 384 kbps)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전장 최하위 단위의 제대까지 범세계적인 통신능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미국 록히드마틴 사(社)가 제작한 MUOS 위성은 총 4개의 위성체군(Constellation)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 위성체에 UHF대역과 WCDMA대역을 처리할 수 있는 듀얼 모듈을 탑재하고 있어 개별 병사들에게 글로벌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우거진 숲속과 같은 열악한 통신환경에서는 고주파 신호들이 저주파신호에 비해 감쇄되는 현상이 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감쇄가 적은 저주파 신호들을 수신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는 특성을 활용하게 되면, MUOS와 같은 UHF대역과 같은 저주파 대역에서의 위성통신 시스템은 확장성과 이동성 측면에서 획기적인 작전운용 능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MUOS는 병사 개개인이 손에 휴대 가능한 휴대전화형 위성단말 지원이 가능하며 약 8만2000여 대의 단말기를 배포해 동시에 2000여 대의 단말기가 동시 접속할 수 있게 개발됐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휴대용 위성통신단말기를 이용한 작전 활용도는 매우 높았으며 미군은 오래전부터 경량화된 단말기를 사용하기 위해 상용위성 시스템과 군전용 위성시스템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던 차에 기존 체계인 UFO가 평균 수명 기간(15년)을 넘기 시작하고 평소 데이터 처리 능력의 3배를 초과 부담하는 상황에 이르자 이를 보강해 줄 MUOS의 발사시기를 앞당기게 됐다.

 휴대전화형 위성단말기 형태의 위성통신체계가 군사작전에서 차지하는 활용성은 상당히 크다. 가시거리의 지형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전시 및 국가 재난 시에 긴급통신으로 매우 효과적이며 적지종심작전이나 특수전 임무 수행 시 기존의 휴대형 단말기의 중량과 설치 시간 소요 등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MUOS 위성과 차기보안형 위성인 AEHF( Advanced Extremely High Frequency) 위성(총용량:~400Mbps·MILSTAR위성의 2배 성능)은 첫 번째 1기의 위성들이 각각 2010년 8월과 2012년 2월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발사됐으며, 현재 수명이 다해 가는 기존의 오래된 위성시스템인 MILSTAR위성과 UFO위성을 점진적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또 현재의 광대역 위성인 DSCS를 대체할 WGS위성(보잉사 제작·총용량: 2.2Gbps)도 4번째 기가 2012년 1월에 발사돼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김현진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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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고무·캔버스 천으로 만든 ‘정글 부츠’ 등장


 


 

일반적인 전투화 소재로 가죽은 지금까지도 가장 애용되며, 아직까지 다른 인공 소재가 제공하지 못하는 특징, 즉 발을 보호하기 위한 내구성과 착용 때의 행동을 보장할 정도의 유연성, 착용자의 발에 일정 수준 적용되는 변형성 등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가죽에도 단점은 있다. 바로 방수다.

 가죽은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의 방수 능력을 제공하며, 특히 약품 처리와 구두약을 이용한 손질을 주기적으로 잘해 주면 꽤 좋은 방수 능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며, 특히 습기와 충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방수 능력은 크게 떨어진다. 게다가 습기가 내부에 차면 그 습기가 다시 밖으로 빠지는 것은 쉽지 않으며, 이로 인해 제1·2차 세계대전 중 참호와 같이 습한 환경에서 장시간 활동하는 병사들은 참호족염 등으로 고통받았다.

 이런 문제는 특히 정글, 즉 열대 우림 기후에서 심각했다. 외부 습기뿐만 아니라 땀으로 습기가 차면 불쾌감뿐만 아니라 참호족염 등의 문제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열대 우림 기후에서의 전투를 위한 전투화, 일명 ‘정글 부츠’가 개발됐다.

 초기의 정글 부츠는 고무와 캔버스 천만으로 구성됐으며 1942년 등장했다. 가죽을 아예 배제함으로써 방수 능력은 좀 떨어져도 대신 가볍고 건조가 빠르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착용 시 기존 가죽 전투화보다 정글에서 훨씬 쾌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발의 보호능력은 매우 낮았으며 무엇보다 실전에서는 몇 주일 만에 전투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만큼 마모가 심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45년에는 목 부분은 캔버스 천, 아랫부분은 가죽을 사용한 복합 방식의 정글 부츠가 등장했으나 종전으로 소량만이 생산됐다.

 그 뒤 정글 부츠에 대한 수요가 재등장한 것이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이다. 이곳에서 전례 없이 오랫동안 열대 우림 환경에 노출된 미군은 본격적인 참전 이전, 즉 미 군사고문단 투입 시점부터 기존 전투화의 부적합성에 고통받았으며 이로 인해 1960년대 중반부터는 새로운 정글 부츠, 즉 ‘열대 환경용 전투화’가 실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에서의 정글 부츠는 개량된 가공 기술 및 소재 기술에 의해 내구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신발’에 해당하는 하부 구조는 가죽이지만 주요 부위, 특히 앞부분은 베트콩이 설치한 꼬챙이 등에서 발을 보호하기 위해 철판으로 보강됐고 목 부분은 나일론 천을 사용, 빨리 건조되고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뛰어나다.

 또 하부 가죽 부분에는 물을 빼기 위해 배수구를 설치했는데, 어차피 습기가 찰 수밖에 없는 정글에서는 차라리 배수성이 높은 편이 낫다고 여긴 것이다. 또 후기에는 ‘파나마 솔’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밑창을 채용, 접지력을 높이고 진흙 등이 이동 중 쉽게 떨어져 나가도록 했다.

 이 새로운 정글 부츠는 실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온대지방에서도 여름에 애용됐다. 그 결과 1980년대 이후에도 나일론 부분을 고강도의 코듀라 소재로 바꾼 정도의 개량을 거쳐 계속 사용됐으며, 가장 기본형인 타입 I(목 부분이 녹색 혹은 검정색) 정글 부츠는 2000년대에야 미군에서 사용이 중단됐다.

<홍희범 월간 ‘플래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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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포병 공격에 佛난리 보병 대부분 전사

베르덩 지역의 총검참호 전쟁기념관.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봉주르 상병은 파리 소르본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조국이 전쟁에 휩싸였다는 소식에 봉주르는 친구들과 같이 주저 없이 프랑스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1871년 보불전쟁에서 위대한 조국 프랑스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생국가 독일에 무릎을 꿇은 이후 알게 모르게 프랑스 청년들의 핏속에는 은연중 언젠가는 그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갚아 주겠다는 복수심이 흐르고 있었다.


 ▶1916년 베르덩 전선의 참혹한 참호전 실상

 그러나 봉주르가 막상 군에 입대하고 베르덩에 배치된 이후 이 지구상에서 실존하는 지옥을 직접 목격해야만 했다. “두개골이 없는 사람이 걸어 다니며 두 다리가 절단된 병사가 달아나기도 했다. 움직일 수 없는 부상병들은 지하대피소에 방치됐다. 상처부위 피 냄새를 맡은 쥐떼들이 몰려와 부상병의 살을 뜯어 먹기도 했다. 참혹하고 처절한 전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신병들은 미쳐서 소리 지르며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다 적군에 사살당하기도 했다. 독일군의 기습적인 화학탄 공격 시 즉각 방독면을 챙기지 못한 병사들은 독가스에 질식해 자신의 목을 쥐어 뜯으며 참호 속에서 뒹굴다 죽어갔다.” 이런 지옥 속에서 용케도 2년을 버텨 온 봉주르 상병도 결국은 이곳 베르덩 전투에서 꽃다운 22년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총검참호(Bayonet trench)’의 유래는?

 프랑스군 제137보병연대 예하 2개 대대는 1916년 6월 10일 독일군의 베르덩 공격을 사전 탐지하기 위해 주 저항선에서 전진배치토록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방으로 전진하는 137연대의 움직임은 독일군 포병관측병에게 포착됐다. 곧이어 수 시간 동안 프랑스군 2개 보병대대는 독일군 포병으로부터 집중적인 포탄세례를 받고 거의 전멸하게 된다.

 “쏟아지는 집중포화에 우리는 교통호 바닥을 기기만 했다. 미처 유개호를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박 같은 독일군 포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의 울부짖는 소리, 중대장은 전화통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차라리 죽음을 각오한 봉주르에게는 구수하게도 느껴진다. 갑자기 봉주르 상병은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파리의 센 강변에서 같이 웃고 떠들었던 대학 시절의 친구들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가 봉주르는 축 늘어지며 힘없이 눈을 감았다.” 총검 참호 기념관에 남아 있는 프랑스군 병사의 애틋한 사연을 필자가 각색한 내용이다.

 나중에 프랑스군이 이곳을 재점령했을 당시 보병대대 병력은 대부분 전사했으며 길쭉한 프랑스군의 총검들만 무너져 내린 교통호 흙더미 사이로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노출된 보병이 포병의 집중포격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 주는 전장 사례다. 전쟁이 끝난 후 이와 같은 비극적인 사연을 기려 1920년 12월에 ‘총검참호(Bayonet trench)’라는 전쟁기념관을 완성했다. 긴 교통호와 총검을 상징하는 구조물과 건물 내부 무너진 참호 흙더미 위의 십자가에는 간간이 꽃다발이 걸려 있다. 물론 봉주르도 프랑스 후손들이 이런 전장의 비극을 더 이상 체험하지 않도록 하늘에서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20여 년 후 똑같은 비극이 마지노선에서 재현되면서 봉주르 상병의 기도는 물거품이 됐다.


마지노 요새 내부 시설(환기통 및 내부배관과 바닥에 보이는 협궤 철로).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 마지노선(Magino line)을 만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부터 프랑스 정부에서는 독일 국경지역에 난공불락의 대규모 요새지대 건설을 구상한다. 특히 지난 전쟁에서의 끔찍한 대량 살상전 경험을 통해 병사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는 방안을 먼저 고려했다. 결국, 공격전으로 무모한 병력피해를 가져오는 것보다는 방어 위주의 전략을 프랑스는 채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요새진지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킨 마지노(Andre Maginot) 국방장관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부사관으로 베르덩 전투에 참전해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었다. 1927년부터 시작된 마지노선 건설 공사는 1936년 불·독 국경지역에 약 700㎞에 달하는 철벽같은 요새지대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이 계획의 근본적인 취약점은 벨기에 국경지역인 아르덴느 산림지대의 요새진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또한 약 40여만 명의 정예 프랑스 육군을 융통성 없는 붙박이 병력으로 고정시켰다. 이런 취약점을 잘 분석한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의 기갑군단을 아르덴느 숲 속으로 기습적으로 진격시켜 프랑스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게 된다.

 현재 마지노 요새지역은 관광지가 돼 일반인들에게 부분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마지노 요새는 교통 불편으로 단체 여행객이 아니면 현장방문이 어렵다. 그러나 막상 마지노선 내부관람을 하게 되면 1930년대의 프랑스 토목공사 기술 수준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아울러 지하 30~40m 아래 설치된 각종 시설과 협궤 철도를 이용한 요새지 간의 교통망 등은 프랑스인들이 전쟁대비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금방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시설이 지하거주 장병들의 쾌적한 생활을 위한 것들이며 정작 전투력 발휘를 위해서는 몇 개의 포탑과 기관총 총좌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생존성 보장에 치중하다 보니 잠망경을 통해 제한된 외부관측만이 가능해 은밀하게 접근하는 적을 포착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또한 장기간 폐쇄공간에서 생활하는 장병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포도주에 안정제를 타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요새지대 생활은 장병들의 공격정신을 사라지게 해 결국 전쟁 발발 시에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적만을 대응하는 지극히 소극적인 군대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Tip]베르덩(Verdun) 전투-제1차 세계대전 중 가장 길고 잔혹

 베르덩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가장 길고 잔혹했던 전투로 꼽힌다. 1916년 2월부터 1917년 여름까지 프랑스 베르덩을 중심으로 독일군의 반복적인 공격과 프랑스군의 반격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54만2000명, 독일군은 43만4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통과시킬 수 없다: 느 빠스롱 빠(Ne passeront pas!)”라는 구호 아래 필사적인 저항을 했으며 후일 프랑스 대통령이 된 유명한 드골(De Gaule) 대위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독일군은 이곳에서 30여m의 불꽃을 뿜어내는 화염방사기를 최초로 사용했다. 그 결과 항복하는 프랑스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두오몽 요새의 정예 33연대가 독일군에 손을 들기도 했다. 또한 탱크·항공기·독가스 등 대량살상무기가 쌍방에 의해 무자비하게 사용됐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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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니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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