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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20 세계의 전사적지 답시기 - ‘노블레스 오블리주’ 발상지 프랑스 칼레
500여 년 자부심이 佛 상무정신 순식간에 자괴심으로


프랑스 칼레 해변 휴양지의 독일군 해안포 진지를 도색한 모습.


프랑스의 칼레 해변에서 바다 건너편 영국을 보면 도버 항구의 하얀 절벽(white cliff)이 어렴풋이 보인다.이곳 칼레는 영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역사적으로 전쟁이 빈번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운명을 가진 듯하다.부산항이 일본과 근접함에 따라 수백 년 전부터 빈번한 왜구 침범이 있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아시아 대륙 진출 발판이 된 것과 흡사하다.


 ▶사회 지도층은 국민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1337~1453) 중 ‘칼레’는 영국군에 포위된다. 칼레 시민들은 거센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는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항복하게 된다. 칼레 시민군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항복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영국 왕은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며 도시 대표 6명에 대해 교수형을 요구했다. 이 상황에서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처형을 자처한다. 이어서 시장·상인·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교수형을 동참한다.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여섯 명의 귀족이 교수대에 모였을 때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동한 영국 왕은 결국 사면하게 된다. 이와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은 이곳 프랑스 칼레에서 약 600여 년 전에 처음 생겨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1940년 5월 훌륭한 상무정신을 자랑했던 프랑스 선조의 전통이 못난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서 독일군에 또다시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아직도 1600년대에 축성한 견고한 칼레성이 해안에 버티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1940년께 독일군이 건설한 거대한 해안 포 진지들이 또한 산재해 있다. 수많은 휴양객이 찾는 시내 주변 해안의 독일군 해안포대는 시멘트로 봉합한 후 페인트로 깨끗하게 정겨운 그림을 그려 놓았다. 관심 깊게 보지 않으면 오가는 여행객들을 위한 화장실로 착각하기도 한다.



독일군 통신벙커를 활용한 프랑스 칼레 전쟁기념관.


 ▶패전의 역사도 전시하는 칼레 전쟁기념관

 칼레 전쟁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이 통신벙커로 사용했던 시설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기다란 콘크리트 벙커의 내부를 고쳐 제1·2차 세계대전 당시의 각종 무기·장비와 유대인·프랑스군 포로에 대한 독일군들의 잔학행위에 대한 기록과 사진들이 주로 전시돼 있다.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돼 있으나 이곳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념관 내부의 전시물과 각종 사진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필자 혼자뿐. 전시 벙커인지라 두꺼운 콘크리트 격실은 극히 협소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불과 6주 만에 프랑스는 제대로 된 결정적인 전투도 없이 항복했다. 그것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시 과거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았다며 승전국으로서 당당하게 독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던 ‘꽁삐에뉴’ 숲 속 바로 그 기차 안에서 이제는 거꾸로 독일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레지스탕스의 저항 외에는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프랑스는 이 기념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군복과 무기류를 많이 전시했다. 또한 독일군에 대거 포로로 잡힌 프랑스 군인들이 명예로운 자신들의 군복을 벗고 죄수복으로 갈아입는 사진도 수치스럽지만 걸어 두고 있다. 프랑스 포로들이 구걸하는 듯한 모습으로 독일 경비병들에게 반합을 내밀고 있는 그림까지 있었다. 당장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군인의 자존심도 내팽개친 듯하다. 아울러 무게 56톤, 구경 406㎜의 거대한 독일군 해안포 진지건설과 포탑 운반과정을 여러 사진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기중기를 부분적으로 활용하지만 대부분은 개미떼처럼 달라붙은 수많은 전쟁 포로와 점령지 주민에 의해 이뤄졌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진들은 어깨에 프랑스 국기를 단 여성들이 군수공장에서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많은 전쟁 포스터와 함께 제시된 이 사진들은 추정컨대 영국 내의 무기 공장인 듯했다. 특히 각종 그림은 영국·미국 여성들에게 전시 조국을 위한 각종 노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홍보하고 있다. 옷소매를 높이 걷어붙이고 알통을 자랑하면서 “We can do it!(우리는 할 수 있다)”이라고 외치는 영국 여성의 당찬 모습이 눈길을 끈다. 미리 전쟁에 대비해 프랑스인들이 평시에 저런 노력의 10분의 1이라도 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록 자랑할만한 전쟁승리에 관한 영광의 전시물은 별로 없었지만, 과거 패배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정확하게 알리고자 하는 정직한 프랑스인들의 역사의식은 본받을 만했다.


 ▶아일랜드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하는 어느 아이리시(Irish) 여행객

 기념관 관람을 거의 끝낼 즈음 프랑스군 포로와 유대인들의 처참한 삶에 대해 꼼꼼히 살피고 있는 한 중년 신사를 만났다. 텅 빈 전시관에서 두 사람만 있으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관심을 표시한다. 그는 아일랜드인으로 특히 세계 전쟁사에 관심이 많다며 자기 나라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700여 년 지배를 받는 동안 가난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아이리시(Irish)들이 해외 이민을 떠났다.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전사자의 40%가 아이리시였다. 고달픈 이민자들은 단지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군에 지원했고 동족끼리 총칼을 겨눠야만 했다. 1921년 가까스로 독립하면서 아일랜드는 또다시 1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는다.

 이런 처참한 과거를 가진 자기의 조국을 늘 가슴 아파했던 브랜단(Brandan·55) 씨는 자연스럽게 세계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거주하며 현재 목수 일을 하고 있다. 12세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화학공장에서 일하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독한 화학물질의 후유증으로 현재 시력장애가 있으며 의사는 그에게 컴퓨터 사용을 금지시켰다. 개인의 역사인식은 명문대학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 하는 학력의 문제가 아니고 브랜단 씨처럼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기 민족의 문제를 얼마나 고민하느냐에 따라 결국 결정된다는 것을 느꼈다. 의기가 투합된 두 사람은 칼레 가까이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시 비극의 현장 덩케르크에 같이 가기로 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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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니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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