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안의 아군 구조’ 영국 배 총출동

가슴 한편엔 ‘비참한 패주’로 남아 …  전몰장병 묘역은 쓸쓸한 적막감만

 

 

 철수작전 중 독일군 공격을 받는 영국 함정. (출처:덩케르크 해양박물관)

 

 

 ▶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결정적인 실수 독일 기갑군단의 쾌속 진격 중지 지시.

 

 1940년 5월 25일 아침, 숨 가쁘게 영·불 연합군을 추격해 온 구데리안의 독일군 전차부대는 덩케르크를 불과 20㎞ 앞두고 있었다. 이제 연합군은 흡사 목에 밧줄이 감기어 누군가가 잡아당기기만 하면 숨이 끊어질 수 있는 위기에 놓인 사형수의 입장이 됐다. 바로 이 순간 “귀관의 부대는 일단 현 위치에 정지하고 추후 명령을 기다릴 것!”이라는 믿기 어려운 히틀러의 지시문이 독일군 기갑군단에 떨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전 기간을 통해 독일군이 저지른 가장 큰 작전상의 실패 중 하나이며 이 뜻밖의 행운 덕분에 수십만 명의 연합군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전쟁 후 수많은 역사학자는 히틀러의 이런 지시 배경에 대해 연구했으며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째, 전쟁 발발 후 보름간 너무나도 수월하게 얻어 온 손쉬운 승리가 히틀러로 하여금 새삼스러운 조심성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이 공군력만으로도 덩케르크 해변의 연합군을 쓸어 버릴 수 있다는 허풍이 히틀러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히틀러는 영국군의 명예로운 철수를 허용함으로 앞으로 영국과의 강화조약을 염두에 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영국군 섬멸을 위한 히틀러의 내부적인 각종 지시를 분석해 볼 때 설득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시행된 덩케르크 철수(일명 Dynamo 작전)를 통해 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 장병 33만8682명이 목숨을 구했다. 그럼에도 5월 20일 이후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에서 독일군에 포위된 연합군 100만 명 중 얼마나 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었는지 아직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다.

 

일반 공동묘지와 함께 조성된 영·불 연합군 전몰장병 묘역.

 

 

 ▲템즈 강의 거룻배로부터 민간 여객선까지 끝없는 선단이 도버해협을 건너 덩케르크로 향했다.

 13세의 영국 소년 윌리엄은 해양소년단 연습용 돛단배를 갖고 친구들과 함께 덩케르크로 가는 군함을 따라나섰다. 군함의 뒷갑판에서 수병이 마이크로 위험하니 되돌아가라는 권고 방송을 아무리 내보내도 요지부동이었다. “괜찮아요. 우리는 해양소년단원입니다. 우리 돛단배에 군인 아저씨 5명쯤은 태울 수 있다고요!” 군함이 뿜어내는 거친 파도 속에서 위험스러운 항해 끝에 윌리엄과 그 친구들은 그 작은 돛단배에 결국 30여 명의 영국군을 태우고 성공적으로 도버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시작되면서 영국 해군성은 전국 모든 배에 징발명령을 내렸다. 템즈 강의 유람선으로부터 구시대의 유물인 증기선, 개인 소유의 호화 요트에 이르기까지 온갖 배가 프랑스와 마주 보는 도버 해안으로 몰려들었다. 배 소유주인 민간인들의 불평 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징발대상에서 제외된 침몰 직전의 낡은 어선과 소형 모터보트의 주인들까지 달려와 자기들이 직접 조종해 덩케르크로 가겠다고 해 해군 당국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형형색색의 배들로 구성된 선단이 영국군 구조를 위해 출항하자 해군에 의해 참가를 거절당한 온갖 배들이 애국심에 불타는 시민들에 의해 선단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윌리엄과 그 친구들도 그 일행 중의 한 무리였다.

 아비규환의 덩케르크 해변! 바늘 꽂을 틈도 없이 부두를 빼곡히 메운 병사들은 독일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퍼부으며 달려들어도 그저 자리에 납작 엎드려 총탄이 자신을 피해 가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초췌하고 피로에 지친 수많은 영국군이 긴 줄을 이뤄 철수순서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대부분의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질서정연했고 패주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명의 병사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대형선박의 구명보트를 모두 바다에 내려놓았다. 보트에 탄 병사들은 철모로 물을 퍼내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노를 저었다. 놀랍게도 이런 방법으로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돌아온 군인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작전 기간 중 동원된 총 861척의 선박 중 13척의 구축함을 포함해 272척이 침몰했고 영국 공군은 177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군과 민간의 혼연일체로 진행된 이와 같은 철수작전으로 유럽파견 영국군의 대부분은 고스란히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날 ‘덩케르크 철수’라는 말은 혼란 속의 비참한 패주를 뜻함과 동시에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빠져 나온 행운을 상징하는 말로 기억되게 된다.

 1940년 6월 4일 오전 2시, 드디어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일부가 덩케르크 시내로 밀고 들어간다. 미처 철수선박을 타지 못한 8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우왕좌왕하며 해변에 남아 있었다. 해안 모래사장에는 연합군이 남기고 간 6만3000여 대의 차량, 2만 대의 오토바이, 475대의 전차와 장갑차량, 2400문의 야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독일군 1개 야전군이 활용 가능한 물량이었다.

 

 ▲덩케르크 해변의 전쟁 기념비는 찾기 어렵고 전몰장병 묘역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오늘날 덩케르크 해안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손꼽힌다. 백사장 주변 해안도로에는 음식점들과 대형극장이 늘어 서 있다. 1940년 5월의 비극을 상상할 수 있는 전쟁기념탑이나 추모비는 찾아보기 어렵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아일랜드인 브랜단 씨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프랑스의 무관심을 성토하고 있는데 옆자리의 어떤 사람이 불쑥 끼어들며 반박한다. 그는 덩케르크 시 공무원이었다. 흥분한 그 사람이 전쟁기념 현충석벽과 연합군 묘지가 있다며 안내를 자청한다. 그와 함께 간 영·불군 묘역은 일반 공동묘지와 같이 조성돼 있었다. 프랑스 국기가 없다면 전몰장병 현충시설로 구분되기도 어려웠다. 또한 전쟁기념 석벽은 해변에서 자동차로 한참 걸렸다. 더구나 어둠까지 찾아와 자세히 식별하기도 곤란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영국군 위주의 작전이었고 상당수의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포로로 남겨졌다. 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서운한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시내의 해양박물관 일부 전시관에서는 비교적 소상하게 제2차 세계대전 시 덩케르크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여기↓ 아래 손가락 모양(view on)을 꾸~욱 눌러주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마니아군
이전버튼 1 이전버튼

티스토리 툴바